이미지 출처=AI 생성(Chat GPT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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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출신이세요?"

"지방이요."

이 짧은 대화 속에 한국 사회의 공간적 위계가 압축되어 있다. '지방'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불편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언어 속에 숨은 위계

'지방(地方)'의 사전적 의미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여기서 핵심은 '수도에서'라는 전제다. 지방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중심과의 거리로만 정의된다. 마치 태양 없이는 행성이 될 수 없듯, 서울 없이는 지방도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다.

이런 언어 구조는 우리의 인식을 지배한다. "서울 가요"라고 하면 상경上京이지만, "부산 가요"라고 하면 그냥 이동일 뿐이다. 서울로 가는 것은 '올라가는' 것이고, 서울에서 떠나는 것은 '내려가는' 것이다. 수직적 위계가 언어 깊숙이 뿌리박혀 있다.

이미지 출처=AI 생성(Chat GPT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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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집중이 보여주는 현실

언어의 위계는 현실을 반영하기도 한다. 100대 기업 중 79개사의 본사가 수도권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매출액 기준으로는 전국 1000대 기업 중 743개 기업이 수도권에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 전국사업체조사에 따르면, 2023년 말 전체 사업체 수는 623만8천580개로 전년 대비 1.6% 증가했다. 이 중 상당수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어 지역 간 불균형을 보여준다.

이런 현실에서 지역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은 취업을 위해 수도권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지방대 출신'이라는 말이 단순한 지역 표시를 넘어 사회적 위치를 암시하게 되는 이유다.

춘천에서 본 '지방'의 딜레마

춘천시의 사례를 보자. 강원도의 행정 중심지이자 춘천닭갈비·의암호·남이섬으로 유명한 관광도시다. 그러나 여전히 언론과 정책 현장에서는 '지방도시 춘천'으로 표현된다. 문제는 이런 인식이 정책 방향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지역발전 정책이 '수도권 기능 분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각 지역의 고유한 강점을 살리기보다는 '서울의 것을 나눠주는' 방식의 접근이 주를 이룬다.

춘천만의 독특한 자연환경과 문화적 자산은 저평가되고, '서울이 아닌 곳'이라는 소거적 정의만 남는다. 이런 인식 하에서는 춘천 고유의 발전 방향보다 '서울화'가 발전의 지표가 된다.

이미지 출처=AI 생성(Chat GPT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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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인식, 로컬의 재발견

그러나 변화의 신호도 감지된다. 코로나19 이후 지역으로 이주하는 청년들이 늘어나면서 '로컬'이라는 용어가 주목받고 있다. '지방'이 중심-주변 구도를 전제한다면, '로컬'은 독자적 삶의 공간으로서의 가치를 강조한다.

제주도가 대표적 사례다. 제주는 더 이상 '지방'으로 불리지 않는다. 제주만의 고유한 브랜드 가치가 인정받으면서 '제주'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됐다. 이는 지역이 서울의 주변부가 아닌 독립적 중심지로 인식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언어부터 바꿔야 할 때

언어의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일부 언론사들은 '지방대' 대신 '지역대학'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정부도 공식 문서에서 '지방정부' 대신 '지방자치단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개인 차원에서도 변화가 가능하다. "지방에서 왔다" 대신 "춘천에서 왔다"거나 "부산에서 왔다"고 구체적 지명을 말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는 각 도시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첫걸음이다.

이미지 출처=AI 생성(Chat GPT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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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균형발전을 향하여

진정한 균형발전은 서울을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이 자신만의 중심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부산은 해양도시로서, 대구는 섬유·패션의 중심으로서, 춘천은 자연친화적 문화도시로서 각각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100대 기업 중 79개사가 수도권에 집중된 현실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사고의 출발점은 달라질 수 있다. 지방이라는 말이 사라질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다중심 사회를 시작할 수 있다.

김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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